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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신부

​로 / 리아샤카

※가상이지만 시대 상, 질막에 관한 성차별적인 신체 인식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결혼피로연은 신부 없이 끝이 났다. 피로연이 열리는 내내 신부 자리는 비어있었다. 늦은 밤까지 군가를 합창하던 웃음소리가 수그러들자 연회장은 고요했다. 아이오리아는 천천히 상석에서 일어났다. 수발을 드는 이들은 이미 술에 취해 나가떨어진 뒤였다. 상석 자리 아래에, 식탁과 바닥, 벽에 기댄 모두가 독한 포도주 향에 널브러져 있었다. 마치 그가 몰살한 시체들처럼. 
   아이오리아는 혼자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아이오리아!
   제 형은 그에게 마음에 드는 것은 무엇이든 고르라고 했다. 왕가의 보물이 놓인 비밀 통로에는 전설로만 전해지던 검과 창, 투구와 보석이 가득했다. 그의 형은 시체에서 검을 뽑고 있었다. 아이오리아는 제 형을 돌아보았다.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투구를 벗었다. 우리 왕께서 허락하신 일이다. 목에 박힌 검이 생각만큼 잘 뽑히지 않자 그의 형은 왕자의 가슴팍을 있는 힘껏 찼다. 
   그러니 아이오리아, 무엇이든 골라라.
   아이오리아는 제 발아래를 흘끗 보았다. 제 형의 발길질에 떨어진 목이 여기까지 굴러와 있었다. 벌어진 입(그러나 채 나오지 못한 비명), 아직도 또렷한 푸른 시선은 제 형의 칼이 날아들던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그때 제 병사들이 부수고 태웠던 지난 왕가의 물건들을 떠올렸다. 절벽 위 왕궁 바로 아래까지 진격했다. 퇴로는 차단했다. 숲에는 불을 질렀다. 투항이 멀지 않았다. 병사가 한 액자를 불에 처박았다. 틀이 뒤틀리며 초상화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순간 불길이 치솟았다. 어어! 병사들이 놀라 뒤로 물러섰다. 불길 너머에서 아이오리아는 초상화 속 인물과 눈이 마주쳤다. 불똥이 뚝뚝 흐르던 푸른 눈. 
   아이오리아. 
   제 형이 한 팔로 그의 어깨를 껴안고 웃었다.
   이젠 네가 동부의 왕이다.
   피와 땀이 엉겨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이 뺨에 달라붙은 제 형은 꼭 공놀이를 하다가 뛰어온 소년 같았다.
    
   (쉿.)
   아이오리아는 두 손으로 육중한 접견실 문을 밀었다. 동부의 역사와 뿌리를 수놓은 거대한 계보가 죽은 버드나무 줄기처럼 그의 어깨로 흘러내렸다. ‘우리를 묶으려면 사슬이 필요하리라’ 그는 갈기갈기 찢긴 융단을 걷고 방으로 들어섰다. 그늘 속에서 여자들이 주저앉아 꺽꺽거리고 있었다. 
   (조용히 해, 정복자가 지나간다.) 
   아이오리아는 잠자코 앞만 바라보고 걸었다. 
   제 부하들은 이곳으로 행군하는 내내 숲속에서 나는 이상한 소리를 못견뎌했다. 도대체 저게 무슨 소릴까요, 대장? 불길해죽겠어요. 꼭…… 그냥 새 소리다. 단칼에 말을 자른 아이오리아는 말고삐를 제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말이 자꾸만 투레질하며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동쪽 숲에만 사는 호랑지빠귀 울음이다. 들어본 적이 있어. 그러나 병사들은 떨고 있었다. 아니, 무슨 새가 저렇게 운답니까? 꼭 뭔가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아요, 대장님. 숲을 가로지르지 말고 돌아서 갑시다. 진짜 뭔가 부르는 것 같다구요. 
   접견실을 가로지르던 아이오리아가 횃불을 더 높이 들어 올렸다. (그래도 여자들한텐 손대지 못하게 했잖아.) 천장 조각상에 튄 핏자국이 불빛에 비추어 기이하게 일렁였다. 포로들이 아무리 열심히 닦아냈어도 채 다 지우지 못한 핏자국. 
   아이오리아가 자리에 멈추어 섰다. 접견실 안 모든 쑥덕거림이 멎었다. 그가 물었다. 신부가 있는 방은 어디인가? 무서울 만큼 조용했다. 그가 다시 물었다. 신부가 있는 방은 어디지? 누군가 속삭였다. 
   ……장군님의 신부는 탑에 있어요. 
   접견실을 가로지르는 그의 등 뒤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우리 신부와 함께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사소서, 왕이여.
   (부디 당신이 죽인 내 아들만큼 만수무강하소서.) 그는 접견실 문을 닫았다. 문 너머에서 다시 여자들이 울기 시작했다. 어두운 동쪽 숲 호랑지빠귀처럼. 
    
   신부 방 앞에는 감시병도 호위병도 없었다. 그는 문 옆 횃불 걸이에 불을 꽂고 제 손을 비추어보았다. 성을 함락하고 말끔히 씻었지만 손금 새로 스민 거무튀튀한 핏자국은 남아있었다. 문틈에 빈틈없이 꽂아 넣은 꽃 장식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황무지에서나 자랄 법한 보잘것없는 꽃들. 당연했다. 아이오리아는 제 장검을 문 옆에 놓아두었다. 왕국의 화원과 온실은 그가 모조리 태워버렸다. 징을 박아 넣은 팔뚝 보호대와 장갑도 벗어 창틀에 놓았다. 그는 이 정도면 신부에게 충분히 시간을 주었다고 생각했다. 문을 열었다. 작은 꽃들이 그가 쓴 화관 위로 떨어졌다. 패망국 여인들이 그의 머리를 빗어 넘겨 정돈하고 씌운 동부의 관이었다. 
   자신은 신부가 도망칠 시간을 충분히 주었다. 
   신부는 침대 위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캐노피를 걷고 침대 위로 오르면서 아이오리아는 문득 조금 전 지나친, 갈가리 찢긴 거대한 융단을 떠올렸다. ‘우리를 묶으려면 사슬이 필요하리라’ 그는 신부의 어깨를 손끝으로 천천히 쓸었다. 신부는 레이스를 겹겹이 엮어 뜬 긴 면사포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은실같이 가는 레이스를 따라 고운 살이 그의 손에 닿았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소?
   아이오리아가 물었지만 그는 대답이 없었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냐고 물었소.
   신부가 중얼거렸다. 
   당신은 내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낮은 목소리였다. 신부의 몸짓에 따라 면사포에 수놓은 진주장식이 자르륵, 부딪혔다. 
   …외국으로 망명하고 싶어 하는 삼촌께서 보내신 겁니다.
   아이오리아는 촛불을 받아 알알이 빛나는 진주들을 눈으로 훑었다. 진주만큼이나 많은 쪽지가 은밀히 꿰어져 있었다. 면회를 금지한 제국군 장군에게 패망국의 귀족들이 바치는 공물이리리라. 신부는 면사포 밖으로 제 두 손을 모아 내밀었다. 아이오리아는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마디마디가 길고 흰 사내의 손. 
   반지들은 중앙으로 편입하고 싶어 하는 큰고모께서 보내신 겁니다. 
   아이오리아는 가죽을 덧댄 망토를 벗어 침대 밖으로 떨어뜨렸다. 
   이건 당신 첩실에게 주세요.
   신부가 무릎을 세워 치마 밖으로 발을 내밀었다. 발등을 얽은 얇은 은사슬마다 작은 다이아몬드가 반짝거렸다. 
   그리고 면사포는 당신의 정실이 될 공주에게 보내……
   아이오리아가 신부의 두 손을 잡아 쥐었다. 신부의 목소리가 멎었다. 그는 입술로 신부의 얼굴을 천천히 더듬어 내렸다. 면사포를 따라 이마와 코, 턱 끝으로 굴곡지는 흰 실루엣은 가늘게 떨고 있었다. 아이오리아가 말을 꺼냈다. 
   당신을 무어라 부를까요? 
   대답이 없자 아이오리아는 신부에게로 더 몸을 기울였다. 
   다른 사람들은 당신을 어떻게 부릅니까? 
   ……딸린 시종들은 어머니 성을 따라 부르고 성 사람들은 천한 것의 자식이라 부릅니다. 
   아이오리아는 면사포 안쪽으로 슬쩍 비치는 신부의 귓바퀴를 조심히 매만졌다. 그가 물었다. 
   그럼 당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은 당신을 무어라 부릅니까? 
   신부는 몇 번이나 망설이다 혀끝으로 제 이름을 밀어내듯 속삭였다.
   샤카. 
   아이오리아가 그 이름을 따라 불렀다.
   …샤카.
   
   오늘 무얼 좀 먹었습니까?
   신부는 아무 말도 없었다. 아이오리아는 제품에서 과일 한 알을 꺼냈다. 꼭지에 손톱을 박아 넣고 양 손으로 힘을 주자 열매는 반으로 갈라졌다. 그가 과일 반쪽을 신부에게 내밀었다. 
   먹어요. 
   다 알고도 초야를 치룰 겁니까?
   아이오리아는 신부를 마주보았다. 레이스 사이사이로 푸른 시선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제국을 떠나기 전, 반드시 승리하고 돌아오겠노라 맹세한 스테인글라스 아래 신상(神像)처럼. 그가 면사포를 살짝 걷어 신부의 머리 뒤로 넘겼다. 입술은 화장기가 없었다. 
   그래요.
   그는 신부의 손에 석류를 쥐어주었다.
   싫은가요?
   그래요.
   아이오리아는 샤카의 양손을 잡아 제 입술 가까이 가져갔다.
   그럼 먹어요.
   둘의 손바닥 새로 흐른 과즙이 시트 위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가 샤카의 손바닥에 묻은 붉은빛에 입 맞추었다. 흔적이 없으면 의심받아요. 
   잠자코 있던 신부가 있는 힘껏 석류를 깨물었다. 알이 단단한 과일이 그의 송곳니에 으그러졌다. 아이오리아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 물었다.
   오늘 밤이 지나면 무엇을 하고 싶소? 부인이 원하는 건 다 이루어드리리다.
   
   그는 동부를 함락한 공으로 이미 보물로 가득한 성 두 채를 하사받았다. 중앙으로 돌아가면 제왕은 친히 그에게 왕가의 망토를 두르고 검을 내릴 것이다. 
   아이오리아가 면사포를 완전히 걷어 넘겼다. 진주들이 머리 뒤로 뽀얀 파도처럼 쏟아져 내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액자 속 불똥 같은 눈물이 흐르는 푸른 눈. 샤카가 대답했다.
   복수.
   아이오리아는 샤카의 뺨을 닦아주려다 제 손이 지나치게 거칠다는 걸 깨닫고는 손을 내렸다. (우리 신부와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부디 당신이 죽인 내 아들만큼 만수무강하소서!) 신부는 장군이 그날 지하 보물창고에서 고른 것 중 가장 초라한 전리품이었다. 
   그럼 먹어요. 
   아이오리아의 말에 샤카는 붉은 즙이 흐르는 입술로 남은 석류를 물어뜯었다. 
   그럼에도 그가 가장 탐냈던 것이었다.
   

2021 세인트 세이야 여장합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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