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別離(별리)

​먕 / 사가미로

   야속하게도 날이 무척 좋았다. 바람도 햇볕도 강하지 않아 먼 길을 떠나기 좋은 날이었다.
   사가는 보석함을 들어올렸다. 뽀얗게 먼지가 쌓인 오래된 물건임에도 녹슬거나 패인 자국 없이 깨끗했다. 그럴 만도 하다. 보석함이 마지막으로 사람 손길을 탄 것은 십 년 전이다. 십 년 전, 사가가 나고 자란 땅을 떠나 오아시스 반대편에 다다른 날. 앳된 티가 채 가시지도 않은 열 여덟 난 소년이 신부가 되어 결혼식을 올린 날. 그날 이후로 그것이 다시 열린 적은 없었다. 사가는 그것을 그저 내버려 두었고, 감히 그의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댈 수 있는 이도 없었으므로 그동안 신부의 보석함은 손때가 묻을 새도 없이 그늘진 곳에 놓인 채 묵묵히 세월을 견뎌 왔다. 
   뚜껑을 열자 쌓인 먼지가 햇빛에 반짝이며 하늘하늘 떨어졌다. 모래시계의 깨진 틈으로 흘러내리는 모래처럼. 결혼식 날 걸쳤던 온갖 패물들을 십 년 만에 다시 보고서도 사가의 마음 속에는 추억이나 그리움 따위가 아닌 허무함만이 가득했다. 내가 이곳에서 보낸 세월도 먼지만큼이나 허황된 것이었던가. 고작 돌아오라는 명령 한 번에 정리될 만큼... 색 고운 보석이 줄줄이 달린 팔찌를 집어들자 장신구끼리 부딪히는 차가운 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남들은 경사를 맞아 기쁘게 신부 치장을 한다는데. 그는 하인들을 물리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단 한 번도 내 의지로 해 본 적이 없군. 
   푸르르, 천막 밖에서 낙타가 숨을 토해내는 소리가 들렸다. 치장을 끝내면 신부는 떠나가야 한다.

 


   곧 행렬이 시작된다. 눈을 감고도 그 모습을 그려낼 수 있다. 낙타의 이마부터 목덜미에 걸린 색색의 구슬들. 모래 둔덕마냥 솟은 낙타의 등에는 일족의 정교한 문양이 새겨진 카페트가 덮여 있을 것이고 금은보화를 실은 짐마차들이 그 뒤를 줄줄이 따를 것이다. 사가는 고개를 숙였다. 천막 틈새로 들어온 한 줄기 햇빛이 상자 안에 덩그러니 남은 귀걸이 위로 내려앉았다. 이제 귀걸이만 하면 모든 준비가 끝난다. 번쩍이는 보석 한 쌍을 사가는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푸른 빛을 띠는 보석은 누군가의 눈동자를 닮았다. 처음 만났던 날부터 변함없이 줄곧 애정을 품고 저를 따라다니던 눈동자. 미로. 불현듯 눈동자의 주인이 떠오른다. 어느 날 갑자기 제 삶에 들어와 부부의 연을 맺게 된 소년. 겨우 허리춤에 닿던 시선이 점점 자라 눈높이가 얼추 맞게 되었을 때까지 한 번도 그 눈은 온기를 잃은 적이 없었다. 그 따스한 눈이 이 결혼에 종지부를 찍을 귀걸이 한 쌍에 겹쳐 보인다. 사가는 부러 거울을 보지 않은 채 손가락으로 귓볼을 더듬어 구멍의 위치를 찾고 천천히 침을 밀어 넣었다. 남은 한 쪽을 손에 쥐고 그는 가만히 천막 안을 둘러보았다. 사막의 모래바람과 혹독한 날씨를 견딜 수 있도록 두터운 천으로 지어진 천막은 십 년 동안 그의 집이었다. 미로가 어릴 적 제 방인 양 매일같이 들락거리며 흔적을 남긴 그의 집. 몇 년 전부터 미로의 체취가 배기 시작한, 이제는 혼자 앉아 있기에도 크게 느껴지는 그들의 집. 우리의 집... 
   미로가 보고 싶어졌다. 몰래 만나면 되잖아, 내가 매일 갈게, 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장난스레 말하며 손을 잡아 주었더라면, 아무도 들춰보지 않는 천막 안에서 서로를 품에 안을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그 순간의 기억으로 스스로를 달래며 살아갈 수 있을 텐데. 떠나고 싶지 않다. 당장이라도 기적처럼 귀환령이 철회된다면, 누군가 이곳을 떠나지 못하도록 가두기라도 해 준다면... 그는 입술을 앙다물고 남은 귀걸이 한 쪽을 마저 했다. 약지에 낀 결혼반지가 서늘하다. 금속 특유의 냉기가 손가락을 타고 올라와 저릿하게 심장을 옥죄는 것만 같다. 

 


-

   


   천막을 걷고 나서자 날것 그대로의 뜨거운 태양빛이 쏟아져 내렸다. 사가는 손차양도 하지 않은 채 발을 내디뎠다. 한 발짝. 천막 밖에 늘어선 사람들이 고개를 숙인다. 떠나는 신부에게 마지막 예우를 갖추는 것이다. 언제 이 땅에 올 수 있을지, 다시 미로와 만날 수는 있을지 사가는 알지 못한다. 그가 처음 이 곳에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은 일족의 원로들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두 발짝, 세 발짝. 행렬이 가까워진다. 십년 전 그를 따라왔던 사람들이 해를 등지고 선 채 이쪽만을 바라보고 있다. 차르르, 차르르, 그가 한 걸음 한 걸음을 뗄 때마다 발목에 매단 구슬들이 서로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낸다. 발찌가 아니라 사슬이라 해야 맞겠군, 사가는 속으로 자조했다.

   사가!

   우뚝. 끌려가듯 나아가던 발걸음이 단 두 음절에 멈추었다. 사가는 발에 못이 박힌 듯 그 자리에 멈춰서 버렸다. 며칠 동안 그토록 듣고 싶어했던 목소리였으나, 그는 혼란스러웠다. 어째서 미로가 여기에? 두 사람은 금일부로 더는 한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귀환령을 읽고 장로들이 내린 명령이었다. 그렇기에 제대로 된 인사조차 해 주지 못한 것인데, 그런데 어째서. 기척이 등 뒤에 다가섬과 동시에 손이 덥석 잡혔다.

   사가, 할 말이 있어.

   급히 달려오느라 흐트러진 숨결에도 목소리는 또렷했다. 사가는 미로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으나 그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와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다. 그를 다시 보면 마음 한 구석에 남은 미련이 두 발을 족쇄처럼 묶어버려 더는 움직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놔라, 미로. 

   사가가 겨우 내뱉었지만 미로는 손을 꽈악 쥐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이 손 놔. 규율을 어길 셈이냐.
   
   강한 어조에도 미로는 손을 놓아주기는커녕 아예 손깍지를 껴 버렸다. 결국 참다 못한 사가가 손을 뿌리치려 하자 미로가 다급하게 덧붙였다. 지금 꼭 해야 하는 말이야. 사가는 입술을 꾸욱 다물었다. 더는 미로를 외면할 수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기다렸다는 듯 새파란 눈동자 한 쌍과 마주쳤다. 일렁이는 초조함과 긴장감이 눈동자 안까지 차올라 있었다. 사가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미로의 이런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미로는 매사에 쾌활하고 자존심 세고 자신만만한 사내였으므로. 그런 그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좋아해, 사가.

   그 순간 둘을 둘러싼 시간이 아주 잠깐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의 목소리도, 모래바람에 천막이 펄럭이는 소리도, 모든 것이 일순 조용해졌다. 그 짧은 찰나에 살아 움직이는 것은 미로의 목소리 뿐이었다. 가지 마, 나랑 같이 살자. 나는 지금처럼 너랑... 함께 있고 싶어. 미로의 시선은 떨리고 있었지만 그의 입술은 용케 꾸역꾸역 말을 뱉어냈다. 
   처음으로 미로가 직접 입에 올리는 청혼이다. 십년 전 일족의 원로들에 의해 오갔던 혼담과는 달리, 그 때 열 살이었던 소년이 이제는 훌쩍 자라 곁에 있어 달라고 청하고 있다. 사가는 일전에 미로가 정식으로 하는 청혼이란 어떨까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그 결과물은 좀 더 격식있고 그럴싸했던 것 같지만,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미로의 청혼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청혼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어린아이의 고백 같았다. 그러나 사가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미로가 규율마저 어겨 가며 자신을 잡아 세웠다는 사실이었으므로. 아아, 아무런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사가는 시선을 피했다. 그가 어렵게 입술을 달싹였다.

   미로, 나는 떠나야 하는 사람이다. 이미 결정된 일이야. 
   ...그건,
   내가 이곳에 온 것이 그러했듯 떠나는 것 또한 원로들의 의지에 달려 있다. 너와 나의 결혼으로 두 부족은 평화를 얻었고 교역도 안정적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니 이제는 돌아오라고 하는구나.
   사가, 하지만-
   ...미안하다.

   사가는 차마 미로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미로의 진심을 짓밟은 주제에 그의 일그러진 얼굴을 눈에 담는 것은 너무 잔인할 것 같아서였다. 애꿎은 모래만을 내려다보며 사가는 주먹을 꽈악 쥐었다. ...미안하다, 미로. 사가는 겨우 그 한마디를 내뱉고 고개를 푹 숙였다. 등 뒤에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두 발이 쉽사리 떼어지지가 않았다. 그런 사가의 손을 미로가 조심스레 잡아 올렸다. 사가의 약지에 끼워진 붉은 보석이 박힌 반지에 미로의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

   미로.
   이해해. 원로들의 결정을 무턱대고 거절할 수 없다는 거. 너는 돌아가야 하는 사람이지.
   ...
   ...그래도 다행이다. 

   사가가 고개를 들었다. 미로는 아까의 불안한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평온한 태도였다. 그 평온함이 사가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대체 무엇이 다행이라는 거지? 그는 늘 미로가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오늘은 더더욱 그의 행동을 예상할 수가 없었다. 사가는 미로를 보채려고 했으나, 뒤이은 말에 말문이 막히고야 말았다.

   이곳을 떠나는 데 네 의지가 없다는 건 확실히 알았으니까.
   ...
   그렇지, 사가?

   미로는 빙긋 웃었다. 사가가 사랑하는 미소였다. 보고 있노라면 어떤 근심 걱정도 날아가게 해 주었던 미로의 태양 같은 미소. 그 미소를 보는 것도 지금이 마지막일 것이다. 오아시스 건너편의 땅에 닿으면 더는 그 누구도 미로처럼 사가의 마음을 다독여줄 수 없으리라. 미로, 네가 아니면 그 누구도... 사무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사가는 대답 대신 미로를 와락 안아버렸다. 품 안에서 느껴지는 온기도, 체향도, 몸의 감촉도, 그의 삶의 일부였던 것들이다. 미로의 흔적들이 점차 시간에 휩쓸려 바래갈 것이 두려웠다. 인간이 거역할 수 없는 재앙처럼 언젠가는 미로의 조각들이 떠오르지 않는 순간이 올 것만 같아서.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로는 사가를 마주 안으며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어조로 무어라 속삭였다. 

     «    -    » 

   사가는 미로의 콧잔등이며 이마에 연거푸 입을 맞췄다. 마지막으로 입술까지 맞닿고 나서야 두 사람은 서로를 놓아주었다. 언제나처럼 따스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미로를 향해 사가는 겨우 웃어 보였다.

   ...몸 건강히 잘 지내야 한다.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구나. 그 말을 마치고 사가는 뒤돌아서 저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로 천천히 발걸음을 뗐다. 쿵, 쿵, 발을 내딛을 때마다 사가의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미로가 속삭였던 마지막 말이 자꾸만 귓가에서 메아리친다. 사랑해, 사가. 나를 잊지 말아줘, 나도 너를 기억할게...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미로, 어떻게 감히 너를 잊을까. 내가 어떻게 너를... 

   사가는 낙타가 끄는 마차 앞에서 마지막으로 미로를 한 번 돌아보았다. 끝까지 지켜볼 심산인 듯 미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사가는 미로를 한참이나 바라보다 모래바람이 휘몰아칠 때에야 발판을 딛고 마차에 올랐다.
   마차의 문이 닫혔다. 신부가 탄 마차를 선두로 짐을 가득 실은 수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사가는 미로의 입술이 닿았던 반지를 가만히 만지작거렸다. 십년 전 결혼식 날 어린 미로가 고사리손으로 끼워 주었던 결혼 반지였다. 그는 붉은 보석 위로 입술을 꾸욱 눌렀다. 미로, 너는 아직도 그곳에 서 있니. 그는 마차를 타고 가는 동안만이라도 미로를 마음껏 추억하고 싶었다. 마지막까지 눈길을 떼지 못하던 미로,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봐주던 미로... 미로에게 더 활짝 웃어주었어야 했는데. 사가는 마차의 구석에 웅크리고 무릎 사이로 고개를 묻었다. 벌써부터 미로가 그리웠다. 
먼 길 떠나기 좋은 날, 마차는 오아시스 반대편으로 멀어지고 있다.

2021 세인트 세이야 여장합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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