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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킬 수 없는

​먕 / 리아샤카

   봄철에 떠난 제국의 군대는 눈이 녹고 나서야 귀환했다. 정복전쟁은 제국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다.
   아이오리아는 황제의 알현이 끝나자마자 저택으로 돌아왔다. 마중 나와 있던 사용인들은 일년 반 만에 돌아온 주인을 맞이하기가 무섭게 그 뒤를 따르는 여러 대의 짐마차를 보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하인들 모두가 한 해를 꼬박 일한 돈을 합쳐도 한참 모자랄 막대한 양의 사치품들이 짐마차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가장 기뻐해야 할 아이오리아는 그것들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하인들에게 창고로 옮기라 이르고 성큼성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심지어 주방장이 준비한 제대로 된 식사도 마다하고 곧장 더운 물에 몸을 담갔다. 몸 곳곳의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들이 아려 왔지만 복잡한 심경 탓에 살갗의 통증은 그리 대단히 여겨지지도 않았다. 국경을 넘어올 때에도, 황성의 계단을 밟을 때에도 차분했던 그의 마음속은 황제를 배알한 이후로 줄곧 뒤숭숭한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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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행군으로 여독이 쌓였음에도 아이오리아는 지체하지 않고 황성으로 향했다. 갑옷 차림 그대로 전쟁의 결과를 고하는 그를 대신들은 가히 제국의 충신이라며 앞다투어 칭송했다. 순수한 경탄과 얄팍한 아첨이 섞여 웅성거리던 실내는 황제가 손을 들고서야 숙연해졌다. 황제는 흡족한 목소리로 그에게 부와 명예를 주겠노라 약속했다.
   황제의 손짓에 나이 든 신하가 목을 한 번 가다듬고 손에 쥔 문서를 읽기 시작했다. 아이오리아의 앞으로 내려진 포상은 어마어마했다. 새로 정복된 땅의 영지, 그곳에서 일할 포로들, 값진 비단과 보석, 남부 바닷가의 별장, 명마 여러 필과 금화 수십 궤짝... 귀족이었으나 검소한 무인 집안에서 나고 자란 아이오리아로서는 버거울 정도였다. 그러나 그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머릿속으로 헤아려 보던 아이오리아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황제가 내리는 마지막 하사품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이가 찬 지도 오래인데 아직도 그대는 가까이하는 여인이 없다지.
   ...송구하오나 그렇습니다.
   장군 정도 되는 사람에게 그저 그런 귀족 아가씨는 아깝지. 짐이 그대에게 어울리는 배필을 주겠노라.

   그대가 무릎 꿇린 나라의 공주와 결혼하라. 황제가 말을 내뱉자마자 장내의 공기가 묘하게 어수선해졌다. 아이오리아는 고개를 들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눌렀다. 어째서 망국의 공주를 그에게? 흐트러진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황제는 말을 이었다. 망한 나라의 왕족이라 하여도 그 핏줄만은 그대가 연회장에서 만날 어떤 귀족보다도 나을 것이다. 시시한 집안의 사위가 되느니 그 쪽이 낫지 않겠는가? 용의 꼬리보다는 뱀의 머리가 좋은 법이지.
   뱀의 머리. 그제서야 아이오리아는 깨달았다. 황제의 마지막 선물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무리 한때 왕족이었다 한들 왕을 잃은 왕족은 평민보다도 못한 법이다. 아무런 실권도 없고 오히려 핏줄이 흠이 될 수도 있는 이를 덜컥 신붓감으로 안겨주는 것이 아이오리아에게 득이 될 리 없다. 황제는 '전쟁 영웅' 아이오리아를 견제하려는 것이다. 그가 힘 있는 귀족 가문과 결탁하여 권력에 손을 뻗는 것을 막기 위해서 공을 치하한다는 명분으로 배우자로 별 볼일 없는 이를 들이라는 것임이 분명했다. 더구나 결혼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황제의 명을 거스를 아이오리아가 아니다. 황제는 모든 계산을 이미 끝냈다. 조정은 아이오리아를 견제하려는 이들로 가득하며 조금이라도 황제의 눈밖에 나는 것은 위험하다. 정치 감각이라고는 쥐꼬리만큼도 없는 아이오리아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그는 포상은 내려주겠지만 그 이상은 허락하지 않는다는 경고를 알아차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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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아이오리아는 황제의 견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는 대대로 제국에 헌신한 충직한 가문의 가주로, 애초에 권력에는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그를 이토록 심란하게 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덜컥 얻게 된 신부였다. 스스로 몰락시킨 나라의 공주와 결혼을 하게 되다니. 아이오리아의 의지로 행해진 일이 아니었다 하나, 공주가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 것만은 자명했다. 그런 사람과 앞으로 잘 살 수 있을지 생각하는 것조차 아이오리아에게는 죄스럽게 느껴졌다. 당장 혼례를 올린 뒤 그녀와 마주앉아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미안하오? 내 뜻이 아니었소, 부디 노여움을 푸시오?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가 그녀의 백성들을 죽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아이오리아는 그녀에게 평생 죄인으로 남을 것이다. 당장 결혼식이 한 달 뒤인데... 아이오리아는 마른세수를 했다. 무인으로서 최고의 공을 세우고 돌아왔음에도 마음이 산뜻하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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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달이 정신없이 지나가고 드디어 결혼식 날이 밝았다. 

   결혼식은 제국에서 가장 화려하다는 황궁 안의 예배당에서 열렸다. 초대받은 소수의 하객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두 남녀의 앞날을 축복해 줄 고위 성직자, 아이오리아의 측근들, 그리고 내로라하는 귀족들. 신부 측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객들은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며 결혼식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한데 섞여 웅성거리던 식장은 신랑의 등장과 함께 조용해졌다. 결혼식에 어울리는 활기찬 음악과 함께 아이오리아가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몸에 딱 맞게 만들어진 예복은 조금 불편했기 때문에 그는 혹시나 걸음걸이가 우스워 보일까 긴장한 상태였지만, 다행히 하객들의 눈에는 그저 말쑥한 정장 차림의 새신랑처럼 보였다. 신랑이 자리에 서자 뒤이어 신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악기들의 선율 틈으로 드레스의 매끈한 밑단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났다. 
   아이오리아는 신부 될 사람의 얼굴을 몰랐다. 적국의 왕궁 안에서 국왕 부부와 왕족 몇을 보기는 했으나, 신부가 그곳에 있었는지도 확실하지 않고, 그들의 얼굴이 정확하게 기억나지도 않았다. 결혼식 보름쯤 전부터는 신부의 외모가 조금 궁금해지기도 했으나, 그런 것을 상상하는 것조차 염치없다는 생각에 관뒀다. 때문에 아이오리아가 신부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망국의 공주라는 것 뿐이었다. 다만 미묘하게 술렁거리는 하객석의 분위기로 공주의 모습이 평범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짐작하기는 했다.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나 싶더니 그의 옆에 드디어 신부가 섰다. 곁눈질을 하지 않아도 시야 한 켠에 면사포와 신부가 든 부케가 비쳤다. 생각보다 키가 크군. 아이오리아는 제법 키가 큰 편이었으나, 신부 또한 그와 맞먹는 장신이었다. 그 왕가가 대대로 키가 크던가? 속으로 무의미한 질문을 던지며 아이오리아는 주례를 보는 사제의 지시에 따라 신부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제야 신부의 모습이 보였다. 큰 키에 걸맞게 신부는 골격도 여자치고는 큰 편이었으나,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신부는 아이오리아의 생각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틀어올린 머리카락은 반짝이는 금발이었고 -아이오리아는 그제야 적국의 왕가가 죄다 금발이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 면사포 너머로 보이는 내려깐 눈동자는 벽안이었다. 아이오리아는 신부를 가만히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미인이로군. 그날 국왕 곁에 이런 여인이 있었던가. 그 때 누가 있었는지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지만. 아이오리아는 그녀의 얼굴에서 감정을 읽어내려 애썼으나, 신부는 도통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무표정으로 바닥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랑은 신부에게 반지를 끼워주십시오. 

   사제의 말에 아이오리아는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어느새 결혼식은 막바지에 이르러 있었다. 그는 손수 상자를 열어 신부의 오른손 약지에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알 굵은 반지를 끼워주었다. 

   신랑 아이오리아는 평생 신부만을 바라볼 것을 맹세합니까?

   예. 아이오리아의 묵직한 목소리가 식장 안으로 천천히 퍼졌다. 짧고 간결한 대답이었으나 그 말을 내뱉은 순간 아이오리아는 다시금 심란해졌다. 평생 신부만을 바라본다 하여 이 결혼이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어쩌면 신부에게는 그의 헌신이 올가미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신부는 평생 신랑과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까?

   신부는 가만히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제야 아이오리아는 신부의 이름이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과 신부가 단 한 번도 목소리를 낸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름이야 적국의 왕족이었으니 부르지 않는다 하여도, 어째서? 위화감이 고개를 들기도 전에 사제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신께서 아름다운 한 쌍의 결합을 축복하시니, 두 사람의 입맞춤으로 식을 끝내겠습니다. 
   경쾌한 음악이 다시 연주되기 시작했다. 아이오리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굳어 있었고, 신부는 가만히 눈을 내리깐 채 기다리고만 있었다. 천년 만년 하객들을 잡아 둘 수는 없다는 생각에 아이오리아는 결국 신부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을 걸었다. 저어... 아이오리아가 목소리를 내자 기다렸다는 듯 신부가 그와 눈을 맞췄다. 분명히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아이오리아는 어쩐지 그것이 무언의 허락 같다고 느꼈다. ...실례하겠습니다. 짧게 내뱉고 아이오리아는 고개를 숙였다. 반쯤 걷힌 면사포 너머로 둘의 입술이 맞닿았다. 하객들의 환호와 함께 식이 막을 내렸다.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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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저녁 아이오리아는 몸을 깨끗이 씻고 신방으로 들어섰다. 향초를 켜 두었던 것인지 문을 열자마자 은은한 향기가 났다. 그는 조심스레 문을 닫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침대에 쳐진 얇은 휘장 뒤편에서 실루엣이 어른거렸다.

   ...식을 치르느라 피곤하셨을 터인데, 푹 쉬셨습니까.

   어색하게 말을 붙이며 그가 침대 앞에 다가가 섰다. 공주는 문을 등지고 상아색의 실크 잠옷을 걸친 채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등을 타고 흘러내려 붉은 이불 위에 흐트러진 긴 금발을 내려다보며 그는 말을 이었다.

   원하지 않는 결혼이었다는 것을 압니다. 제가 미우시겠지요. 억지로 품에 안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도 잠시 곁을 내어 주시겠습니까. 그는 어렵게 말을 맺었다. 모든 말이 진심이었다. 망국의 공주가 고국을 짓밟은 장수와 원해서 결혼했을 리가 없다. 두 사람이 한 방에 있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황제의 뜻이었으며, 신하 된 도리는 오늘 혼례를 올리는 것으로 다했으므로 이제 모든 것이 그의 손바닥 위에 있었다. 아이오리아는 본래 가정을 꾸리는 것에도, 여인을 품에 안는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 굳이 무리해서 초야를 치를 필요는 없다는 판단이었다. 아이오리아는 만약 공주가 곁에 다가가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녀에게 침대를 내주고 자기는 소파에서 잘 작정이었다. 하지만 얼마간의 침묵이 흐른 뒤 뜻밖에 공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생각이지. 속으로 의문을 품은 채 아이오리아가 휘장을 걷었다. 
   그는 어색하게 공주의 곁에 앉았다. 여전히 두 사람은 제대로 된 대화도 나눠 보지 못했다. 아무리 사연 있는 결혼을 한다 해도 이보다 찬바람 날리는 첫날밤은 없으리라. 아이오리아는 고요를 좋아했으나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어색한 침묵은 고역이었다. 그는 참다 못해 무언가 말을 붙여 보려다 새로운 문제에 맞닥뜨렸다. 눈 앞의 여인을 어떻게 불러야 할 것인가? 부인이라는 호칭은 가장 적합하지만 공주가 그 호칭을 받아들일지가 의문이다. 하물며 그는 아직 제 부인의 이름도 모르지 않는가? 억지로 맺어진 연이라고는 하나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 아이오리아는 괜히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그가 큼큼 헛기침을 했다.

   면목없습니다만 저는 아직 그대의 이름을 듣지 못했습니다. 이름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공주는 몸을 돌려 아이오리아를 마주보았다. 시린 벽안에는 결혼식 때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감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한참 동안이나 그를 바라보고만 있던 공주는 아이오리아가 초조함을 느낄 때쯤 입술을 움직였다.

   그럼요, 장군.

   순간 창 틈새로 들어온 바람이 촛불을 할퀴고 지나갔다. 공주의 얼굴에 진 그림자가 크게 일렁이며 기묘한 표정을 만들어냈다. 아이오리아는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입을 열지 않는 공주의 목소리가 내심 궁금하던 차였으나 공주의 목소리는,

   제 이름은 샤카랍니다.

   아이오리아의 상상보다 훨씬 낮았고, 굵었고, 묵직했고, 그가 상상한 모든 범주를 보기 좋게 벗어나 있었다. 아이오리아는 동물적인 감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그가 이성보다는 직관에 의존해 살아오면서도 실패한 적이 없었던 것은 그의 감이 일반인에 비해 월등히 예리하기 때문이었다. 여자치고는 큰 키와 골격, 보는 눈이 많을 때에는 한 번도 들려주지 않았던 낮은 목소리. 아이오리아의 뇌리에 불길한 확신이 스쳤다. 당신, 설마... 아이오리아 자신조차 놀랄 정도로 그의 목소리는 경악으로 떨리고 있었다. '공주', 샤카가 눈꼬리로 호선을 그리며 샐쭉 웃었다. 아이오리아는 숨을 들이켰다. 눈 앞에 있는 사람은 분명 아름답지만, 그렇지만...

   자, 이제 어찌 하시렵니까?

   눈 앞에 있는 것은, 그와 부부의 연을 맺은 사람은, 사내다.
   망국의 왕자, 샤카가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2021 세인트 세이야 여장합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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