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신기루 신부

​로 / 사가미로

      미로는 동틀 무렵이면 큰 천막까지 맨발로 걸어갔다. 부족의 모든 남자가 이미 아침 단장을 마치고 모여 있었다. 그들은 아흐마드 영감이 커피를 내리길 기다렸다. 아흐마드가 무쇠 팬을 올리고 생커피콩을 볶기 시작하면 그와 가장 가까이 앉은 남자는 절구를 준비했다. 쿵쿵, 쿵. 카펫을 따라 절굿공이 소리가 사막의 맥동마냥 퍼져나갔다. 염소와 양과 낙타, 우물과 태양을 깨우는 소리였다. 
   미로는 산발이 된 머리로 부족 어른들 사이에 앉아 하품했다. 진하게 졸인 커피는 오른쪽부터 한 잔씩 돌아갔다. 영감은 미로에게 커피 대신 달디 단 대추야자를 내주었다. 누군가 한탄했다. 영감, 너무 어리광을 받아주지 마요. 이제 곧 신랑이 될 녀석인데. 
   식사를 마치고 화롯가에 둘러앉은 남자들은 낙타를 어디에 방목할지를 두고 실랑이를 벌였다. 거대한 모래폭풍이 오기 전, 여름 목축지와 겨울 목축지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를 두고도 싸웠다.  
   그때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가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컵을 내려놓았다. 모든 남자들이 일제히 말을 멈추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로도 어른들 틈에서 고개를 쏙 내밀었다. 사내는 커피 받침을 잔 위에 뚜껑처럼 엎어놓고 재빨리 컵을 뒤집었다. 잠시 후 그는 잔을 떼고 컵에서 흘러내린 걸쭉한 커피 찌꺼기를 살폈다. 아흐마드 영감이 물었다.
   점괘는 어떤가? 
   잎사귀와 원이 보이니… 조만간 부족의 재정 문제가 해결될 겁니다.
   
   미로는 태어나면서부터 오아시스 너머에서 온 신부와 결혼할 예정이었다. 너무나 머나먼 곳이라 내륙 유목 민족들 중에선 아무도 그 왕국에 가본 이가 없었다. 오직 아흐마드만이 그 신성한 결합에 반대했다. 왜? 미로가 물었다. 우리가 결혼하면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물건을 나눠 팔고, 함께 염소를 칠 거라고 들었어. 그는 일곱 살 때부터 낀 제 약혼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잘 때도 씻을 때도 빼지 못하게 한 반지였다. 다들 좋은 일만 일어날 거래. 영감은 홀쭉하게 주름이 팬 얼굴을 양손으로 가렸다. 너는 아니야. 나는 왜? 영감은 더 말을 잇지 않았다.
   미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아흐마드 영감이 가르쳐준 대로 혼인 서약을 연습했다. 나는 이 혼약을 받아들여 앞으로 당신을 내 보호 아래에 두겠습니다. 나는 이 혼약을 받아들여 당신을 내 보호 아래에 두겠습니다… 그는 발등에서 공을 떨어뜨리지 않으려 애쓰며 중얼거렸다. 나는 이 혼약을 받아들여 내 보호 아래에 두겠습니다…… 바람이 흰 튜닉을 헤치고 지나갔다. 나는 이 혼약을 받아들여 당신을…… 소년은 공을 무릎 위로 올려 통통 튕겼다. 나는…   
   
   아흐마드 영감은 몇 번이나 미로의 덧옷을 매만졌다. 나도 네 나이 때 이 옷을 입고 신부를 맞았지. 거추장스러워. 미로가 투덜거리자 그는 소년이 장식 단추를 뜯지 못하도록 제 손바닥으로 아이의 손등을 눌렀다. 아흐마드는 오늘따라 미로를 엄하게 바로 세웠다. 자세를 똑바로 해, 미로. 어깨를 펴고 독수리처럼 시선을 멀리 둬. 물결처럼 끝없이 퍼진 사구 곳곳에선 모래폭풍이 일다 사라졌다. 미로는 꼼짝없이 서서 기다렸다. 터번이 뜨겁고, 금색 자수를 놓아 빳빳이 세운 옷깃이 뒷덜미를 자꾸만 찔렀다. 
   그는 놀고 싶었다. 계곡으로 가 풀을 뜯고 오는 제 낙타들과 어울리고 싶었다. 소년이 낙타 몰이를 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는 노련한 낙타들. 귀가 축 처진 새끼염소를 약 올리며 공을 차고 싶었다. 배도 고프고 목도 몰랐다.  
   순간 둥, 북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아침마다 큰 천막에서 커피콩을 빻는 소리 같았다. 둥, 둥, 사막의 맥동 같은 북소리는 점점 커졌다. 뙤약볕에 지친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다. 
   하늘 위로 거대한 왕국이 나타났다. 거꾸로 뒤집어져 너울거리는 협곡과 암벽을 깎아 만든 거대한 성채, 아래에서 위로 나부끼는 깃발, 바다에 대놓은 큰 선박들, 사막 반대편으로 거꾸로 치는 파도, 그리고…… 미로는 하늘로 쳐든 고개를 기울였다. 
   끝없이 긴 낙타 행렬이 신기루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너무나 멀어 아무도 가본 적이 없다던 그 왕국. 
   신기루 왕국이다.
   미로가 중얼거렸다. 모래언덕을 따라 혼례복으로 입는 아바즈 자락이 고운 바람처럼 나부꼈다. 흰 말을 탄 누군가가 행렬을 이끌며 오고 있었다. 미로는 일행 뒤로 사람이나 짐승 모두 발자국 한 점 남지 않은 것을 보았다. 마치 하늘에서 걸어온 사람들처럼. (미로, 뭐해. 어서 가.) 미로가 엉거주춤 앞으로 나아갔다. 모두가 그를 빤히 보고 있었다. 흰 옷을 입은 신부가 말에서 내렸다.  
   음, 나는…
   미로는 더듬거렸다.
   나는, 당신과 함께 하겠습니다.
   신부는 미로의 잔을 받고도 얼마 동안 말이 없었다. 당황한 대리인이 둘 앞으로 나서려던 차에 신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이 혼인을 받아들여 앞으로 당신을 내 보호 아래에 두겠습니다. 
   (이 멍청아. 반대로 말했잖아!) 어른들 틈에서 아이들이 입을 벙긋거렸다. (이제 베일 넘겨, 베일 벗겨, 빨리!) 허둥지둥 베일 끝을 잡았으나 신부가 그보다 훨씬 더 컸다. 신부가 천천히 미로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미로는 베일을 뒤로 넘겼다. 녹색 눈이 무심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미로 가까이 몸을 숙이자 길게 땋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몇 번이나 새로 보내주었던 것 같은데…
   그가 미로의 손을 잡아 제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미로는 숨을 멈추었다. 지참금으로 주렁주렁 매달고 온 팔찌도 목걸이도 없는 신부는 오로지 자신과 똑같은 반지 하나만을 끼고 있었다. 신부가 중얼거렸다.
   금세 자라는구나.
   
   
   사가!
   남자들이 그를 소리쳐 불렀다. 신부는 미로의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나자 사람들이 일제히 낙타에 싣고 온 짐을 내리기 시작했다. 
   
   상단을 꾸려… 중간 거처마다…… 먼저 사람을… 우리 측에선 이 조건… 보증인……납품은… 배편으로…… 좋다구! 그럼 세금 감면도? 국경통행증은… 벌써 그렇게? …순익이, 하하, 역시!
   
   
   부족 남자들이 걸걸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미로는 저 소리를 알고 있다. 그건 시장에서 평소보다 더 좋은 값에 낙타를 넘길 때 어른들이 내던 웃음소리였다. 돈을 나누고 더 큰 사업을 논할 때 나오는 웃음들. 
   부족 남자들 가운데 선 그는 전혀 웃지 않았다. 잊지 마시오. 이 혼약은… 알고 있다고, 사가! 누군가 그의 등을 두드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알고 있어! 그때까지 우리 손님으로 그냥 편히 지내다 가게나! 순간 모래바람이 훅 일었다. 미로는 눈을 감았다 떴다. 신부는 모래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두 부족 간의 사업이 안정되면 예정대로 파기할 테니) 
   
   미로는 자신의 아름다운 신부가 언젠가 신기루처럼 사라질 거라는 걸 알았다.  

2021 세인트 세이야 여장합작

  • 합작 공개트윗으로 이동
bottom of page